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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4~1975년 베트남전쟁에 5만명 한국군 파병(위키백과 출처)

    • 6방두놈
    • 13-10-02 01:51
    • 4,188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입니다.
    “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 사람들은 모두 생명, 자유, 행복을 추구할 천부의 권리를 조물주로부터 부여받았다. ”
      — 베트남 독립 선언의 서문, 호찌민 - 1945년 9월 2일, 하노이, 바딘 광장
    매복 중인 프랑스 군인. 1952년호찌민은 1945년 9월 2일 일본이 항복문서에 조인한 날에 맞추어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세우고 독립을 선언하였다. 호찌민은 베트남 독립 선언의 첫머리에서 미국 독립 선언의 구절을 차용하여 천부인권을 선언하였다. 또한, 미국의 전략사무국 책임자로서 1945년 4월부터 대일 전쟁을 함께 하였던 아르키메데스 페티 소령을 귀빈석에 초대하였다.[14] 호찌민은 트루먼 독트린에 입각하여 미국이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승인해 주기를 희망하였다. 베트남 전쟁과 관련된 미국 국방부의 비밀 보고서인 《펜타곤 페이퍼》에서는 “1945년 말에서 1946년 말까지 프랑스와 베트남이 소강상태를 보일 때 호찌민은 백악관에 정부의 승인을 요청하는 전문을 계속하여 보냈다.…… 하지만, 호찌민은 아무런 회신을 받지 못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15]

    한편, 프랑스는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 바오 다이를 내세워 베트남국을 세웠고[10], 결국 베트남 민주 공화국과 프랑스 사이에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일어났다.[16] 8년간 계속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1954년 5월 7일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가 궤멸적인 패배를 맞아 종결되었고[17] 1954년 4월 26일부터 7월 21일까지 열린 제네바 협정을 통해 평화협정을 맺게 되었다. 제네바 협정 의장국이었던 영국의 외무장관은 "회의 최종 선언"을 발표하여 통일된 베트남을 수립하기 위해 1956년 7월 이내에 보통선거를 진행한다고 규정하였다. 이는 한반도 분단 상황에서 1947년 11월 14일 국제 연합이 의결하였던 총선거 방식을 준용한 것이다.[18]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후 정전 협정의 준수를 감시 하기 위해 캐나다, 인도, 폴란드로 구성된 국제 조정 위원회가 조직되었다. 하지만, 캐나다는 사실상 미국이 원하는 대로 활동하였다.[19]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를 지원했던 미국은 프랑스가 물러난 뒤 공산화 된 중국을 견제할 전략적 요충지로서 베트남을 바라보았고, 도미노 이론을 내세워 베트남에 반공 정부가 세워져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베트남 공화국의 수립과 분단[편집] 베트남 공화국, 응오딘지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제네바 협정. 1954년1954년 5월 미국은 남베트남에 대한 경제 원조 계획을 발표하였고, 12월 23일에는 미국, 프랑스, 남베트남 간의 상호 방위 조약을 추진하였다. 당시 미국은 냉전에 의한 소련과의 대립 속에서 베트남 문제를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미국의 군사 보호는 베트남 남북 모두의 군사 동맹 가입을 제한한 제네바 협약을 어긴 것일뿐만아니라, 제국주의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려는 베트남인들의 의사에도 반하는 것이었다.[20]

    당시 바오 다이의 베트남국은 이미 국정 운영능력을 상실하여 민심 이반이 극에 달해 있었다. 1955년 1월 미국은 군사고문단을 파견하면서 새로운 정권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응오딘지엠을 지지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바오 다이는 왕위를 내줄 생각이 없었고 미국과 갈등을 빚기 시작하였다.[16]

    한편, 1955년 6월 6일 북베트남의 호찌민 정부는 제네바 협정의 규정에 따라 베트남 통일 정부 구성을 위한 선거를 실시하기 위한 협의를 촉구하였다. 그러나, 6월 28일 미국의 국무장관 덜레스는 적당한 전제 조건 없이는 투표를 할 수 없다고 거부하였다. [21] 결국 미국은 1955년 10월 23일 남베트남 지역의 국민 투표를 실시하였다. 바오 다이의 베트남국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남베트남 사람들은 왕국의 폐지와 공화국의 수립을 묻는 국민 투표를 환영하였다. 남베트남에서 45만 명의 유권자가 참가하였고 사이공에서는 98.2%의 높은 투표율로 60만 5025표가 등록되었다. 선거 이후 10월 26일 바오 다이가 폐위되고 응오딘지엠을 대통령으로 하는 베트남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남베트남인들은 새로운 정부를 지지하고 기대하였으나, 1년 후 지엠 정권의 부패와 실정에 실망하였고 반정부 시위가 잇따르게 되었다.[22] 이로써 베트남의 남북 분단은 고착화 되게 되었다.

    베트남인들은 응오딘지엠 정권을 미국의 괴뢰 정권으로 인식하였고, 원조에 의존하는 남베트남의 경제는 정부의 부패로 인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정은 농민들이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지지하는 요인이 되어 남베트남에서는 크고 작은 시위와 무장 봉기가 그치지 않았다. 한편, 호찌민이 이끄는 베트남 민주공화국(북베트남)의 공산주의 정치에 불안을 느낀 북부 지역의 로마 가톨릭 신자들 약 80만-100만 명이 남부로 이주하여 왔고 이들에 대해 편향적인 종교 정책을 취한 응오딘지엠 정권은 불교와 극심한 갈등을 겪게 되었다.

    내전에서 대리 전쟁으로[편집]북베트남은 미국이 원하는 분단 고착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무장 봉기를 지원하였다. 미국은 남베트남이 자력으로 국가를 유지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되자 1964년 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직접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였다.

    미국 개입 이전에 있었던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사이의 교전은 제네바 협정의 불이행에 따른 내전의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미국이 직접 개입하고 대한민국, 태국 등의 국가가 지원군을 보내는 한편, 소련역시 직간접적으로 북베트남을 지원하면서 베트남 전쟁은 냉전 구도에 따른 대리 전쟁의 양상을 띄게 되었다.

    1955년~1963년: 지엠 정권[편집]
    워싱턴을 방문한 베트남 공화국 대통령 응오딘지엠과 인사하는 미국 대통령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와 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 1957년 5월 8일. 응오딘지엠,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지엠 정권의 독재[편집]응오딘지엠은 독실한 로마 가톨릭 신자이자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 역사학자 루도안후인(Luu Doan Huynh)은 “지엠은 편협하고 과격한 민족주의를 앞세운 독재 정권이었고 친족들로 권좌를 채우는 네포티즘을 펼쳤다”고 평가하고 있다.[23] 지엠은 동생 응오딘누를 수석보좌관 겸 비밀경찰 책임자로 세웠고, 독신이었던 지엠은 국가 의전에서 누의 아내 마담 누를 퍼스트 레이디로 삼았으며, 마담 누의 아버지는 미국 대사로, 어머니는 국제 연합 참관인으로 보냈다. 자신의 친형은 후에의 추기경으로, 다른 2명의 형제들은 지방의 권력자로 임명하였으며, 사촌과 일가 친척역시 주요 요직에 등용하였다.[24]

    응오딘지엠은 부유한 가톨릭 엘리트였고 식민지 정부의 관료였다. 이때문에 다수의 베트남인들은 지엠을 프랑스 지배의 연장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게다가 베트남인 다수가 믿고 있던 불교를 억압하고 베트남을 가톨릭 국가로 만들려한 지엠 정권의 종교 정책은 많은 반감을 불러 일으켰다.

    1955년 초 여름 지엠은 반공 정책을 강화하여 공산주의자뿐만아니라 다른 반정부인사들을 체포, 구금하고 고문하거나 처형하였다. 지엠은 정권에 반대하는 어떠한 움직임도 모두 공산주의로 몰았으며, 1956년 8월 다수의 반대 인사들이 사형당하였다.[25] 디엠 정권의 정치적 박해로 죽임을 당한 사람은 1955년에서 1957년 사이 12,000 명에 달했고, 1958년까지 정치범으로 감옥에 수감된 사람의 수는 약 4만명이나 되었다. 디엠 정권의 반공을 앞세운 독재는 민심 이반을 불러 다수의 베트남인들이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지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26]

    응오딘지엠의 가장 큰 실책 가운데 하나는 토지 개혁 실패였다. 북쪽 베트남 민주공화국이 비엣민 시기 협력의 대상이었던 민족주의적 지주에 대해서까지 예외없이 토지개혁을 단행하여 공포정치라는 비난을 받기까지 하였던 것과는 달리, 지엠 정권은 별다른 토지 개혁을 하지 않아 농민들의 이반을 자초하였다. 베트남의 대표적인 농업지역인 메콩강 삼각주를 비롯한 농지는 프랑스 식민지 시기 이래 지역 인구의 2%인 지주가 전체 토지의 45%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엠 정권이 실시한 토지 개혁은 매우 미약한 것이었다. 1956년 미국의 압력으로 발표한 토지 개혁은 지주의 토지 보유 면적을 1.15 Km²로 제한하였으나, 지주들이 가족에게 토지를 이양하는 것을 허용하여 사실상 토지 개혁 자체가 무용지물이 되었다. 결국, 남베트남의 토지개혁으로 이익을 본 소작인은 10% 정도에 불과하였다. 이와 같은 남북의 토지개혁 차이는 농민들이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지지하는 이유가 되었다.[4]

    1957년 5월 응오딘지엠은 미국을 방문하였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아이젠하워는 응오딘지엠과 함께 뉴욕 시에서 퍼레이드를 열었고 지엠 정권에 대해 계속하여 지지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공식적인 환영과 달리, 당시 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는 사적인 자리에서 지엠 정권의 악행을 알고 있지만 대안이 없기때문에 계속적인 지지가 필요하다고 말하였다.[27][28] 훗날 당시 미국의 국방부 장관이었던 로버트 맥나마라는 베트남 공화국의 새로운 후원자인 미국은 베트남 문화에 대해 무지한 상태에서 간신히 몇 마디 말과 역사가 오랜 나라라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고 기록하였다.[29] 미국은 베트남에 대한 영화 한 편 없는 상태였고, 응오딘지엠은 서구의 방법을 그대로 가져와 베트남 문제를 풀려는 것은 환상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29]

    남부 내의 무력 충돌[편집]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제네바 협정에 따른 총선거가 열리면, “아마도 인구의 80 퍼센트 가량이 공산주의자 호찌민에게 투표하였을 것”이라고 기록하였다.[30] 지엠 정권은 더욱 반대 세력을 탄압하였고 그 때문에 더욱 지지를 잃고 있었다.

    지엠 정권은 1954년부터 1960년 사이 체포한 5만여 명의 사람들을 정치범 수용소에 구금하였다. 1959년 영국의 학자 PJ 허니는 정치범 수용소를 방문하여 구금된 사람들과 인터뷰를 한 뒤 “(정부의) 탄압을 받고 있는 이들의 주장 대부분은 공산주의나 용공 세력의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다”고 기록하였다.[4]

    《펜타곤 페이퍼》는 수인들이 “정부가 반대세력을 격리시키기 위한 수용소”에서 공산주의자건 아니건 고문을 받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지엠 정권은 지방의회 선거에서 비엣민이 승리하자 투표 결과 공표를 거부한 채 정부가 직접 지방 정부를 통치하기도 하였다.[4]

    지엠 정권은 1954년부터 1957년 사이에 광범위하게 일어났던 각지의 저항을 진압하고 1957년 초 남베트남에 처음으로 평화가 찾아왔다고 공표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발표와는 달리 1957년 중반부터 1959년 사이에도 반정부 무장 투쟁은 증가 일로에 있었다. 1959년 초까지만 하여도 지엠 정권은 이를 “베트남 정부를 부정하는 무질서일 뿐 조직적 활동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표명하였으나, 태도를 바꾸어 10/59 법안을 선포하여 반정부 투쟁 가담자를 사형시키고 재산을 몰수하기 시작하였다.[31] 이 시점에서도 옛 비엣민의 목표는 제네바 협정에 따라 총선거를 이행시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옛 비엣민 활동가들은 공산주의자들이나 다른 반정부 활동가들과의 연계 없이 살쾡이 파업을 주도하였다.[4]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입니다.
     
    1960년 12월 20일 떠이닝 성 떤비엔 현 떤럽 사에서 각 계급, 종교, 민족 대표들로 구성된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남어: Mặt Trận Dân Tộc Giải Phóng Miền Nam Việt Nam/ 南越南民族解放戰線)이 결성되었다. 결성 대회는 선언과 10개항의 행동목표를 통과시켰는데, 주 내용은 제국주의 미국과 응오딘지엠 정권을 타도하여 독립, 민주, 평화, 중립의 남부를 세워 통일된 조국을 세우자는 것이었다.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은 1962년 열린 전체회의에서도 평화지역 유지, 중립정책시행,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주장하였다.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지지하는 세력은 1961년 33개 국가 10개 국제조직에서 1964년 63개 국가 400개 국제조직으로 늘어났다.[32]

    훗날 베트콩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과는 달리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은 공산주의자가 아닌 지엠 정권에 반대하는 모든 활동가들도 망라되어있었다. 《펜타곤 페이퍼》는 민족해방전선이 “미국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고 토지개혁을 실현하며 베트남 정부의 민주화를 실현하여 연합 정부 구성을 통한 베트남을 통일하는 것을 주로 강조하고 있다”고 기록하였다. 민족해방전선은 조직 보호를 위해 비밀결사로 운영되었다.[4]

    1961년 2월 15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은 각지에 여러 단위로 나뉘어 있던 전투 부대를 남베트남해방군으로 통합하였다. 같은 해 9월 2일 남베트남해방군 보병 1대대가 설립되었다.[32]

    베트남 공산주의자(Vietnamese Communist)의 경멸 섞인 약자인 베트콩(Việt Cộng, 비엣꼼)이란 낱말은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 결성되기 이전인 1958년 1월 응오딘지엠이 처음 사용하였다. 지엠은 사이공 북쪽 농장지역을 공격한 농민 게릴라를 베트콩이라 비난하였는데, 당시 지엠은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을 모두 공산주의자로 규정하고 있었다. 훗날 남베트남해방군이 게릴라전을 시작하자 지엠은 이들 역시 베트콩이라 불렀는데, 이는 당시까지 이들을 비엣민이라 부르던 여론을 돌리기 위한 것이었다.[33]

    북베트남의 개입[편집]
    베트남 전쟁 당시의 보응우옌잡북베트남이 1960년 이전에 남베트남 무장 투쟁을 지원하고 조직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출처마다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이고 있다. 케인과 루이스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미국의 정책적 가정과는 달리 모든 유용한 증거들로 볼 때 1958년 남베트남의 무장투쟁은 하노이의 개입 없이 독자적으로 발생한 것이다. ... 남베트남에서 발생한 사이공 정부에 대항한 무력 활동의 지도자들은 하노이로부터 어떠한 지시도 받지 않았다. 오히려, 하노이는 무장투쟁에 반대하고 있었다.[4]

    역사학자 아서 쉬레징거 주니어 역시 “1960년 9월 이전까지 북베트남의 공산당은 미 제국주의로부터 남부를 해방하겠다는 천명을 하지 않았다”고 파악하고 있다.[4] 이에 반해, 제프리 레이스는 “그것은 겉으로 보기에만 아닌 척 한 것일 뿐”이지 그런 것을 곧이 곧대로 믿는 것은 “정말 우스운” 일이라는 공산당 탈주자의 인터뷰를 인용하고 있다.[3] 앙쩡구안(Ang Cheng Guan)은 1960년 당시 민족해방전선이 독자적으로 독립을 위해 활동하였고 북베트남이 이에 직접적인 개입을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민족해방전선은 제네바 협정을 준수하라는 북베트남의 선전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고 서술하고 있다.[34]

    1956년 3월 남베트남의 공산주의 지도자 레주언(Lê Duẩn)은 하노이의 정치국에 “남부로 가는 길”이란 제목의 무장 투쟁계획을 보냈다. 이 계획에 대해 소련과 중국은 모두 반대하였고, 레주언의 계획은 거부되었다.[34] 그러나, 제임스 올슨과 랜디 로버츠는 《어디에서 도미노가 무너졌는가:미국과 베트남 1945년 - 1995년》(Where the Domino Fell: America and Vietnam 1945-1995)에서 북베트남의 지도자들이 1956년 12월 시험적인 무장 투쟁 지원을 승인하였다고 서술하고 있다.[35]

    1959년 1월 베트남 공산당은 하노이에서 제15차 전체회의를 개최하였다. 전체회의는 결의를 통해 “남베트남에서 혁명 발전의 근본적인 길은 무장투쟁의 길이다”라고 표명하였지만, 정치투쟁을 통한 승리의 희망도 버리지는 않았다. 호찌민은 미국의 개입을 불러들일 무장 투쟁에 매우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36] 베트남 공산당은 레주언을 제1서기로 선출하였으며〈결의안 15〉를 통해 남베트남의 무장 투쟁을 “인민 전쟁”으로 규정하고[37], 5월부터 호찌민 통로의 정비와 향상을 위한 559 단(Đoàn 559)을 발족하였다. 559단은 6개월에 걸쳐 라오스 산악지역에 통로를 개척하였다. 호찌민 통로가 정비된 첫 해에 500여명의 “재편성” 인원이 남부로 향했다.[38] 호찌민 루트를 통한 군대의 첫 이동은 1959년 8월에 있었다.[39]

    북베트남은 1959년부터 1961년까지 3만명의 병력을 라오스로 보내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지나는 호찌민 통로를 만들었다.[40] 약 4만여명의 병력이 1961년에서 1963년까지 이 통로를 통해 이동하였다.[34] 1964년에는 베트남 인민군 1만여명이 호찌민 루트를 통해 남베트남을 공격하였고, 1965년에는10만명에 달했다.[41]

    1961년~1963년:케네디의 정책[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전략촌 (베트남 전쟁), 팜응억타오입니다.
     
    1967년 남베트남 군사 구역1960년 미국 대통령 선거 결과 존 F. 케네디가 대통령이 되었다. 전임 대통령 아이젠하워가 베트남과 라오스, 유럽, 라틴아메리카의 상황에 대해 언급하며 “그가 보는 것보다 아시아(의 문제)는 더 크다”경고하였지만[42], 케네디는 “얼마를 지불하든, 져야할 짐이 얼마이든, 얼마나 어려운 일이 닥치든, 모든 친구를 지원하고 자유의 승리와 생존을 확약한다”는 야심만만한 공약을 발표하였다.[43] 1961년 6월 케네디는 소련의 니키타 흐루쇼프 수상과 빈 회동을 갖고 베트남 문제를 논의하였으나 합의점을 찾지 못하였다.

    케네디 정부는 트루먼 정부와 아이젠하워 정부 이래 계속 된 냉전을 바탕으로 한 외교 정책의 핵심 사항들을 유지하였지만 여러 방면에서 실패를 거듭하고 있었다. 특히, 1961년 미국 정부는 피그스 만 침공의 실패, 베를린 장벽의 형성, 파테트라오 결성 등의 삼면 위기 대처에 실패하였다.[44] 이러한 실패 때문에 케네디는 공산주의 확산을 더 이상 막지 못할 경우 미국에 대한 평판과 동맹들의 신뢰가 낮아질 것이라 여겼다. 케네디는 베트남에서 공산주의가 승리하는 것을 막기 위해 “모래 위에 선을 긋기”로 결심하였다. 케네디는 니키타 흐루쇼프를 만난 빈 회동에서 돌아온 직후, 뉴욕 타임스의 제임스 레스턴에게 “지금 우리는 우리 힘이 신뢰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하는 문제를 갖고 있고, 베트남이 바로 그런 곳이다”라고 말하였다.[45][46] 케네디 정부는 전임 아이젠하워 정부가 베트남의 문제를 남북간 대결로 몰고가려 한 “단순화 전략”이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활동으로 실패하였다고 보고, 전쟁의 상황에 따라 선전포고 없는 대게릴라 전쟁부터 시작하여 국지전, 통상전, 전술 핵무기 사용으로 전쟁 수위를 끌어 올리는 “유동성 대응 전략”으로 전략을 수정하였다.[47]

    케네디의 남베트남 정책은 지엠의 군대가 스스로 게릴라를 완전히 섬멸하여야 한다는 가정에 기반한 것이었다. 케네디는 미군 전투 부대의 파병에 부정적이었는데, “큰 규모의 파병은 군사적 충돌을 일으킬 수 밖에 없고, 결국 정치적으로 해결은 어려워져 장기적으로는 군사 점령을 지속하게”될 것이라 보았기 때문이다.[48] 그러나, 남베트남 군대는 형편없는 지경이었다. 무능한 지휘부, 부패, 그리고 정치적 거래가 남베트남 군과 정부의 핵심에서부터 만연해 있었다. 1961년 5월, 부통령 린던 B. 존슨은 사이공을 방문한 자리에서 “지엠은 아시아의 윈스턴 처칠”이라 추켜세웠다.[49] 왜 그런 말을 했냐는 질문에 그는 “거기에 우리 편은 지엠 뿐”이라고 답했다.[27]

    케네디의 중요한 관심사 가운데 하나는 소련의 우주 미사일 프로그램이 미국의 것을 앞설 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장거리 미사일의 수준은 미국과 소련이 대등하였지만, 케네디는 우주 공간을 군사화하여 제3 세계에서 일어나는 공산주의 무장 투쟁에 대응하는 것에 관심을 보였다. 베트남의 게릴라들은 프랑스 정규군을 상대로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이미 전선의 후방을 교란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케네디는 미국 육군 특수부대와 같은 특수전 부대를 이용하여 특정 전술 목표에서 소규모 전투를 치르고 전장을 빠져나오는 “브러쉬 파이어” (Brush fire)전술이 주효할 것이라고 여겼다.

    케네디의 고문이었던 맥스웰 D. 테일러와 월트 휘트먼 로스토우는 미군을 홍수 방제 인원으로 위장시켜 남베트남에 파병하자고 제안하였다. 케네디는 이 제안을 거절하였지만 남베트남에 군사고문을 증파하였다. 1962년 4월 존 케네스 갈브레이스는 케네디에게 “우리가 프랑스 군을 대체한 식민지 점령군이 되면 프랑스군처럼 피를 흘리게 될 위험이 있다”고 경고하였다.[50] 1963년, 남베트남에는 16,000 명의 미군 병사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는 아이젠하워가 권고한 900명을 훨씬 웃도는 것이었다.[51]

    전략촌은 1961년부터 세워졌다. 미국와 남베트남이 함께 추진한 전략촌은 농촌 인구를 일정 지역으로 이주시켜 게릴라와 주민을 분리하고 지방에 대한 정부 통제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전략촌이 세워진 뒤 얼마지나지 않아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활동가들이 전략촌에 잠입하기 시작하였다. 지엠 정권의 전략촌 담당자였던 팜응옥타오는 공산주의자들이 가톨릭 교인으로 위장 침투하여 베트남 공화국을 안쪽부터 파괴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지엠 정권이 토지 개혁을 무산시킨 뒤 농민들은 막대한 지대를 지주에게 내고 있었기 때문에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지지하게 되었다.

    1962년 7월 23일, 남베트남과 북베트남, 소련, 중화인민공화국, 미국을 포함한 14개국이 라오스의 중립을 약속하는 조약을 체결하였다.[52] 캄보디아의 시아누크 국왕 역시 중립을 표방하고 있었기 때문에, 베트남 주변국의 상황은 북베트남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응오딘지엠의 하야와 죽음[편집] 1963년 남베트남 군사 쿠데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쿠데타 뒤 총격을 받아 사망한 응오딘지엠1963년 1월 2일 업박 전투에서 350 명 규모의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게릴라 부대가 1,400 명의 남베트남군을 상대로 승리하였다.[53] 이 전투에서 지엠의 총애를 받던 후인반까오(Huỳnh Văn Cao) 장군이 지휘하는 베트남 4군은 크게 패하였다. 까오는 능력보다는 카돌릭 신자라는 종교적 배경때문에 발탁된 인물로, 주된 업무는 쿠데타를 방지하는 것이었다. 까오는 게릴라의 공격을 받자 도망가기 바빴다. 워싱턴의 정책결정자들은 지엠 정권이 쿠데타를 억누르는 데 온힘을 쏟느라 호찌민을 상대하여 공산주의를 막는데는 역부족이라는 생각을 갖기 시작하였다. 1960년부터 1962년동안 지엠은 쿠데타가 발생할 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로버트 F. 케네디는 “지엠은 조그만한 양보도 할 줄 몰랐다. 그는 이성을 잃은 듯 하였다.”고 기록하였다.[54]

    1963년 5월 8일, 석가탄신일을 맞아 후에에서 불교 신자들이 국제불교기를 들고 지엠정권의 불교 탄압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남베트남군이 군중들을 향해 총을 쏘았고, 9 명이 사망하였다. 후에 펏단 총격 사건으로 지엠 정권에 대한 불교계의 분노가 폭발하였다. 지엠 정권은 애초부터 가톨릭에 우호적인 종교정책을 펼치고 있었고, 특히 지엠의 형 피에르 마르탱 응오딘툭(Pierre Martin Ngô Đình Thục)은 후에의 가톨릭 대주교였기 때문에, 후에에서는 종교와 국가가 분리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지엠 정권 기간 동안 후에에서는 가톨릭에 의해 사찰과 석탑이 파괴되는 일이 빈번하였고 석가탄신일을 기념하는 행사 역시 억압받았다. 총격 사건이 일어난 후 불교 지도자들은 책임자의 처벌을 요구하였지만 지엠은 이를 거부하였다.

    1963년 6월 11일 베트남의 승려 틱꽝득이 지엠 정권의 불교 탄압에 항의하여 분신하였다. 그러나, 지엠의 동생 응오딘누의 부인이자 독신이었던 지엠을 위해 퍼스트 레이디의 역할을 하였던 마담 누는 이를 “땡중의 바베큐 쇼”라고 비하하였고 이로 인해 불교 신자들은 지엠 정권에 저항하게 되었다.[55] 8월 21일, 지엠의 동생 응오딘니우(Ngô Ðình Nhu)의 수하인 레꾸앙뚱(Lê Quang Tung) 대령이 이끄는 베트남공화국 특전부대는 수 백 군데의 사찰을 습격하여 석탑을 파괴하였다.

    미국 1963년 중반부터 지엠 정권의 종교 정책 변화를 요구하였다. 미국 국방부가 지엠 정권을 계속 지지하는 동안 미국 국무부는 쿠데타도 용인할 수 있다는 태도를 취하였다. 1963년 8월 23일 미국 국무부는 주베트남 미국 대사 헨리 캐벗 로지 주니어(Henry Cabot Lodge, Jr)에게 전문 243을 보내 불교에 대한 억압과 응오 일가 통치의 핵심인 비밀 경찰과 특수부대를 장악하고 있는 니우를 제거할 필요가 있다고 지시하였다.

    미국 중앙정보국은 지엠 정권을 제거하기로 한 계획을 접수한 뒤 베트남 군부에게 지엠이 하야하더라도 미국은 이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을 것이고 원조를 줄이지도 않을 것이라고 전하였다. 1963년 11월 2일 군부는 쿠데타를 일으켜 지엠과 그의 형제들을 체포하였다. 훗날, 맥스웰 테일러는 베트남 쿠데타 소식을 들은 케네디가 “충격을 받고 집무실에서 달려나와 얼굴을 쓸어내렸다”고 회고하였다.[56] 케네디는 지엠을 죽이는 것을 승인하지 않았다. 주베트남 미국 대사는 쿠데타 지휘자를 대사관으로 초청하여 성공을 축하하고, 케네디에게는 “이로써 전쟁이 더 빨리 종식될 것”이라고 보고하였다.[57]

    쿠데타가 일어난 뒤 남베트남은 혼란에 빠졌고, 북베트남은 이 쿠데타로 남베트남 정권은 미국의 꼭두각시일 뿐인 것이 여실히 드러났다고 주장하였다.[58]

    미국 군사고문단은 남베트남군의 모든 분야에 투입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내전의 본질에 대해 완전히 무지하였다. 남베트남군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게릴라 사이의 내전은 본질적으로 정치 권력 투쟁으로 군사 교전은 부차적인 것이었다.[59] 케네디 정부는 남베트남의 안정을 확보하는 것을 주된 목표로 삼도록 미군의 관점을 재조정하려고 하였고, 이를 통해 주민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미군 지도부는 군사 고문이 베트남 정규군 훈련 이외의 업무를 담당하는 것에 거부감을 보였다.[60] 주베트남 미군사령부의 폴 D. 하킨스 장군은 1963년 크리스마스까지는 완벽히 승리할 것이라고 호언 장담하였다.[61] 그러나, 미국 중앙정보부는 “베트콩은 지방의 상당한 지역을 사실상 지배하고 있으며 그 영역이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이다.”라고 조금은 낙관적이지 않은 전망을 하였다. [62]

    준군사조직인 미국 중앙정보국 특무부는 라오스의 흐몽족을 훈련시켜 베트남에 투입하였다. 이들은 원래 라오스의 공산주의 단체인 파테트라오에 대항할 목적으로 훈련되었다.[63] 미국 중앙정보국은 또한 피닉스 계획을 운영하고 특수작전 수행을 위해 베트남 군사 원조 사령부 연구 관찰 그룹(Military Assistance Command, Vietnam – Studies and Observations Group, MAC-V SOG)을 조직하였지만 성공적이지는 않았다.[64]

    1963년~1969년:린든 정부의 확전[편집]
    북베트남을 폭격 중인 미국 B-66 폭격기와 이를 호위중인 4대의 F-105 전폭기케네디 암살이후 대통령 권한 대행이 된 린든 B. 존슨은 베트남 문제보다 “위대한 사회” 정책을 실행하는 것을 당면 과제로 여겼다. 대통령 자문위원이었던 잭 발렌티는 “그 시점에서 베트남은 자신의 지평을 향해 뻗은 한 사람의 주먹보다 크지 않았다. 그것은 토론할 가치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에 대해 그리 토론을 하지는 않았다.”[65][66]

    1963년 11월 24일 존슨은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전투에 …… 반드시 합류할 것을 …… 강력히 결심하였습니다”라고 말하였다.[67] 존슨의 이러한 공약은 지엠 정권을 퇴출시킨 쿠데타 이후 메콩 삼각주를 중심으로 남베트남 측의 상황이 악화일로에 있었기에 나온 것이었다.[68] 존슨은 11월 26일 국가 안보 조치 각서(National Security Action Memorandums, NSAM) 273호를 통해[69][70] 소규모 특수전을 위주로 대응하였던 케네디의 정책을 뒤집고 1963년 말까지 1만여 명의 병력을 남베트남에 배치하여[71] 전쟁을 확대시켰다.

    쿠데타를 이르킨 군부는 즈엉반민을 수장으로 하는 군사 혁명 위원회를 세웠지만, 베트남 지역에서 활동하였던 미국 언론인 스탠리 카르노프(Stanley Karnow)는 훗날 이들이 “무능력의 표본” 이었다고 평가하였다.[72] 로지는 1963년 말 즈엉반민에 대해 “정상을 차지할 충분한 힘이 있을까?”하는 질문을 받았다. 1964년 1월 응우엔 칸이 쿠데타를 일으켜 즈엉반민을 축출하였다.[73] 그러나, 정국은 여전히 불안하였고 몇 차례의 쿠데타 기도가 계속되었다.

     
    캄보디아 국경 근처에서 생포된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대원을 둘러싸고 있는 미군1964년 8월 2일 , 북베트남 해안에서 첩보 작전 중이던 미국의 구축함 USS 매덕스가 통킹 만에서 북베트남의 어뢰정에게 공격을 받았다.[74] 미국은 이틀 후인 8월 4일 같은 장소에서 USS 매덕스와 USS 터너 조이가 재차 어뢰정의 공격을 받았다고 주장하였다. 공격 전후의 상황이 확실치 않은 가운데 린든 존슨은 국무차관 조지 발에게 “그 수병들이 날치라도 쐈나보지”라고 말했다. [75]

    통킹만 사건 뒤 몇 일이 지난 1964년 8월 7일 미국은 보복을 명분으로 북베트남에 폭격을 감행하였다.[76] 선전포고 없이 진행된 이 폭격은 대통령 존슨이 동남아시아에 주둔중인 미군에 직접 명령한 것이다.[77] 미국 연방 하원은 통킹만 사건이 전면전으로 확대되는 것을 거부했지만, 존슨은 이미 대통령 독단으로 전면전을 개시하고 있었다.[77] 같은 달, 존슨은 “아시아 ‘보이’(영어: boy)들은 자기 땅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도와야 할 것이고 미국 ‘보이’(boy)들이 그곳에 가 싸우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공약하였다.[78]

    통킹만 사건 당시 미국의 주장과는 달리, 2005년 기밀 해제된 미국 국가 안전국의 보고서에서는 8월 4일 어뢰정의 공격은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79] 북베트남은 8월 4일에 있었다는 어뢰정 공격에 대해 통킹만 사건 직후부터 강하게 부인하고 있었으며, 미국 내에서도 여러 차례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지적이 있어왔다. 통깅만 사건 연구가인 루이스 저지스(Louise Gerdes)는 “통킹만 사건은 존슨이 베트남 전쟁에 대한 지지를 얻기 위해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으며, 후에 맥나마라 자서전에서도 이같은 언급이 있었다.[80] 또 다른 미국의 역사 학자 조지 C. 헤링은 1979년 자신의 책에서 “맥나마라와 펜타곤은 결정적이지 않은 사건 증거들에서 자신들이 바라는 것만을 조합하였다.”고 지적하였다..[81]

    “1959년 당시 5천여 명에 불과하였던 베트콩의 수는 1964년 말에는 10만여명으로 추정되었다. …… 반면, 남베트남군의 수는 1백만 여명에서 85만여명으로 감소해 있었다.”[59] 베트남 주둔 미군의 수는 1961년 2천여 명에서 16,500 명으로 증가하였다.[82]

     
    미국 해병대 3사단 1 연대 소속의 해병들이 다낭 공군 기지 인근에서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대원이라 여겨진 사람을 압송하고 있다.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는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을 3단계로 격상시켰다. 1965년 3월 2일, 미국 해병대는 전략 요충지인 쁠레이꾸(Plei Cu)를 공격하였다.[83] 소련 수상 알렉세이 코시긴이 북베트남을 국빈 방문한 동안 전개된 플래밍 다트 작전 과, 롤링 선더 작전, 그리고 아크 라이트 작전 이 진행되었다.[84] 이후 3년간 지속된 폭격의 목표는 북베트남이 남베튼남 민족해방전선을 지원하지 못하도록 북베트남의 방공망과 공업시설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미국은 이를 통해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사기를 꺾고자 하였다. [85] 1965년 3월부터 1968년 11월까지 진행된 “롤링 선더” 폭격으로 북베트남에는 일백만 톤에 달하는 폭탄과 미사일, 로켓이 퍼부어졌다.[86] 베트남 전쟁 전체 기간에 미군이 사용한 폭탄은 모두 700 만 톤에 달한다.[87]

    폭격은 베트남을 벗어난 인근 국가에도 행해졌다. 코만도 헌트 작전과 같은 공군 작전은 호찌민 통로를 파괴하기 위해 캄보디아와 라오스지역을 폭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폭격에도 불구하고 북베트남은 호찌민 통로를 통해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계속하여 지원하였다. 작전에 참가한 미군 장교는 “이 전쟁은 정치적 전쟁이다. 이 것(폭격)은 살인과 다르지 않다. 차라리 칼이 최선의 무기이지 비행기는 최악의 무기일 뿐이다”라고 회의적인 기록을 남겼다.[88] 그러나, 미국 공군 참모총장 커티스 레메이는 베트남 전역에 대한 폭격을 지지하였다. 그는 “우리는 폭격으로 베트남을 석기시대로 돌려 놓을 것”이라고 말했다.[89]

    격화되는 지상전[편집]
    1965년 공격 받은 미군 공군 기지. 유니버셜 뉴스릴 촬영
    미군에 의해 베트콩 용의자로 지목된 농민들. 1966년미국 공군이 주둔한 비행장이 몇 차례 공격을 받게 되자, 미국은 약체인 남베트남군 대신 직접 공군 기지를 방어한다는 이유로 지상 전투 부대를 파병하였다. 1965년 3월 8일 3,500 명의 미국 해병대가 파병되었고, 여론은 압도적으로 파병을 지지하였다.[90]

    미국의 파병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프랑스의 파병과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호찌민은 미국이 “20년동안 전쟁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20년 동안 전쟁을 할 것이다. 미국이 평화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초대하여 함께 차를 마시며 평화를 이룩할 것이다”고 경고하였다.[91] 북베트남의 외교부 제1 대의원 쩐꾸앙꼬는 전쟁의 최우선 목표는 베트남의 통일, 그리고 통일된 베트남의 독립과 안전확보라고 기록하였다.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이러한 목표는 당시 동남아시아의 여러 신생독립국들이 바란 것과 그리 다를 바 없었다.[92] 그러나, “펜타곤 보고서”는 “베트남의 팽창주의는 손쉽게 인접한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집어 삼킬 것이고 …… 그리고, 태국, 말레이시아, 싱가폴, 심지어 인도네시아가 다음 목표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93]

    3,500 명으로 시작된 미국 해병대의 파병은 그해 12월 200,000 명으로 늘었다.[94] 애초에 천명한 파병의 목표는 방어 임무였지만, 미군의 군사는 오랫 동안 공격적인 전쟁에 익숙해 있었고, 미군 사령부 역시 정치적 지침에 따라 방어 임무에 치중하는 것은 익숙하지 않았다.[94] 12월, 빈지어 전투에서 남베트남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95].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게릴라들이 치고 빠지기 작전을 유효하게 사용하여 강력한 남베트남군을 패퇴시킨 것이다.[96] 이로써 6월 동써아이 전투 이후 남베트남군은 연이어 큰 전투에서 패배하게 되었다.[97]

     
    미군이 마을에서 베트콩 색출 작전을 하고 있다.작전 지역을 포기하는 비율이 늘고 사기가 바닥에 떨어지자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은 미국 태평양군 사령관인 U. S. 그런트 샤프 주니어 제독에게 상황이 매우 다급하다고 보고하였다.[94] 샤프 주니어 제독은 “나는 미군의 에너지, 이동력, 그리고 화력이라면 충분히 민족해방전선을 제압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고 답하였다.[98] 이 답변을 회신 받은 웨스트모어랜드는 기존의 주베트남 미군 전략을 남베트남군 지원과 방어에서 직접 공격과 독자적인 작전 수행으로 전환하였다.[99] 웨스트모어랜드는 전쟁 승리를 위한 세 단계 계획을 수립하였다.:

    1 단계: 1965년 말까지 미국과 여타 “자유 세계” 군대가 위수 지역에서 영토를 잃는 경향을 멈출 필요가 있음.
    2 단계: 미국과 동맹국의 군대가 게릴라와 적군을 포위 섬멸하는 대규모 공세를 시작. 이 단계는 적군이 지역 방어를 포기하고 패퇴할 때까지 계속하여 대부분의 지역을 회복할 때까지 계속.
    3 단계: 2단계 작전 수행 후 12 개월 내지 18개월이 지났을 때 적군이 계속하여 저항할 경우, 남아있는 적군의 이동 기지 지역을 최종적으로 섬멸.[100]
    존슨 정부가 승인한 이 계획은 남베트남 정부가 게릴라를 억제할 책임이 있다고 하였던 케네디 정부의 구상과는 배치되는 것이었다. 웨스트모어랜드는 1967년 말까지는 최종적으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 예측하였다.[101] 존슨은 이러한 전략 변경을 언론에 알리지는 않았지만, 전쟁이 계속될 것이라고 말하였다.[102] 미국의 이러한 정책 변환은 북베트남 및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과 보다 격렬한 무장 충돌을 가져오게 되었다.[103] 이 계획은 미국이 직접 전투 수행에 나섬으로써 남베트남 정부가 보류하였던 다른 당면 과제들을 처리할 수 있도록 하자는 의도도 포함하고 있었다.[103]

     
    글래스버러 회합에서 만난 소련의 알렉세이 코시긴 수상과 미국의 린든 B. 존슨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미군의 의무 복무 기간은 1년이었다. 한 병사는 “우리가 베트남에 10년 동안 있지는 않게지만, 1년씩 열 번을 있을 것”이라고 자조하였다.[88]

    남베트남에는 온갖 물자가 넘쳐나게 되었는데, 스탠리 카노우는 “사이공의 PX(Post Exchange, 영내 매점) 규모는 뉴욕의 백화점 블루밍데일즈에 맞먹을 정도”였다고 기록하였다.[104] 미국의 이러한 변화는 남베트남 사회의 경제에도 영향을 주었다. 남베트남에서는 부정부패가 만연하였다.

     
    1967년 당시의 호찌민 통로. 라오스 영토를 지나 남베트남으로 연결되었다.미국은 동남아시아조약기구(Southeast Asia Treaty Organization, SEATO)에 파병을 요청하였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대한민국, 태국, 그리고 필리핀이 베트남 전쟁에 파병하였다.[105] 그러나, 북대서양 조약 기구의 회원국이었던 캐나다와 영국은 파병을 거부하였다.[106] 미군은 파병된 동맹국 군대와 연합작전을 하였다.

    이 기간 동안에도 남베트남의 정치 상황은 매우 불안정하여 쿠데타 시도가 빈발하였다. 공군 총사령관이었던 응우엔 까오 끼와 국무장관이었던 응우엔 번 티에우 등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1967년 티에우는 키와 연합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탈취하였다. 티에우 정부는 표면상으로는 민간 정부를 표방하였으나, 티에우가 군부를 장악한 상태에서 실권을 차지한 사실상 군사 정권이었다.[107]

    존슨 정부는 미디어 대응 정책으로 이른바 “최소한의 진실 정책”을 도입하였다.[108] 전쟁에 대한 뉴스와 이야기들은 정부의 통제하에 미디어에게 제공되었다. 이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대중들은 전쟁에 대한 정부의 공식발표를 믿지 않게 되었다.[108]

    구정 대공세[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구정 대공세입니다.
    웨스트모어랜드의 미군이 꽝찌 성에서 케산 전투를 벌이느라 베트남 중부 내륙으로 이동한 사이[109], 베트남 민족해방전선과 북베트남은 베트남의 음력 설날 명절인 뗏(Tết) 휴일에 이틀 동안 휴전을 하겠다는 약속을 깨고 1968년 1월 30일 남베트남 전역에서 기습 공격을 시작하였다. 100 곳이 넘는 도시에서 공격이 이루어 졌으며, 주베트남 미군 사령부의 본부와 미국 대사관이 있던 사이공 역시 공격을 받았다.

     
    후에에서 전투 중인 미해병대구정 대공세 초기 미군과 남베트남군은 고전을 면치 못하였고 상당 수의 지역에서 퇴각하여야 하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막강한 화력으로 응전하여 베트남 민족해방전선과 북베트남의 공격을 막아내었고, 이 과정에서 특히 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전투원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응우웬 왕조 시절의 수도였던 후에는 한 때 베트남 민족해방전선과 북베트남의 베트남인민군에 의해 점령되었으나 미군은 도시 전체의 80%가 폐허로 변하는 포격을 퍼부으며 전투를 벌여 후에를 탈환하였다.[110] 후에 전투 중 베트남 민족해방전선과 북베트남 측이 후에에 살고 있던 비전투원을 학살하는 일이 벌어졌다. 후에 학살에서 희생된 민간인의 수는 수 천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전쟁 후 북베트남은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에 의한 민간인 살해를 인정하였다.

    북베트남과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은 구정 대공세를 통해 잠시나마 남베트남의 주요 도시들을 획득할 수 있었지만 결국 큰 피해를 입고 퇴각하였다. 그러나, 구정 대공세는 그 동안 전쟁 승리를 낙관하였던 미국내 여론에 큰 충격을 주었다.

    주베트남 미군을 총괄하던 베트남 군사 원조 사령부의 사령관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미군의 표상이었다. 그는 《타임》지가 선정한 1965년 올해의 인물이었고[111], 《타임》은 그를 “미국 전사의 늠름한 화신 …… 역사에서 바로 뛰쳐나온 듯 전투 계획을 수립하고 …… 병사들에게 그가 지닌 미국의 목표와 책임을 이상적으로 제시하였다”라고 평했다.[111] 1967년 11월 웨스트모어랜드는 린든 B. 존슨 정부와 함께 승리를 낙관하고 있었다.[112] 그는 네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베트남 전쟁이 “끝이 보이는 단계”에 와 있다고 공언하였다.[113] 구정 대공세로 웨스트모어랜드의 단언이 허풍일 뿐이란 것이 드러나자[112] 미국의 미디어들은 미군이 막대한 병력을 투입한 존슨 정부의 정책이 효과적인지 의문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존슨 정부는 군사적 실패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결국 존슨은 재선에 실패하게 되었다. 구정 대공세를 펼친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은 정치적 승리를 거둔 것이다.[112]

    제임스 위츠는 구정 대공세가 “존슨 정부와 군부가 만든 …… 베트남 전쟁의 단계를 정면 반박하는 것”이었다고 평하였다.[112] 구정 대공세로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은 변환점을 맞을 수 밖에 없었다. 그 동안 미국 정보 당국이 평가하고 있던 베트남 민족해방전선과 북베트남의 전력이 과소 평가되어 있었다는 것이 드러나자[105][114] 언론인 피터 아네트는 벤쩨에서 근무 중인 익명의 장교가[115] “마을을 탈환하려면 파괴할 필요가 있다”는 명령을 받았다고 폭로하였다.[116] 또 다른 정보원은 제9 보병 사단의 부리스 소령이 이러한 명령을 하였다고 지목하였다.[117]

     
    구정 대공세 중 미국 공군이 주둔 중인 떤선녓 공항을 공격하다 사망한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과 베트남 인민군의 전투원들CBS 이브닝 뉴스의 앵커였던 월터 크롱카이트는 “우리는 지난 시기 잘못된 낙천가가 내놓는 증거들을 통해 승리가 멀지 않았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패배에 직면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무책임한 비관주의일 것입니다. 냉정히 현실을 보면 우리는 스테일메이트(stalemate, 체스에서 서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 되는 것)에 빠진 것 같습니다. 불만스럽지만, 그게 결론입니다.”라고 논평하였다.[118][119] 크롱카이트가 이와 같이 논평하자, 존슨 대통령은 “크롱카이트를 잃는 다면, 미국 중부를 잃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120][121]

    1968년 3월 구정 대공세가 정리되자 웨스트모어랜드는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 이는 정규 인사의 결과였지만, 구정 대공세가 있었던데다 그가 20만 명의 증파를 요청하였다는 것이 언론을 통해 폭로되자, 격렬한 비난을 받았다. 베트남 군사 원조 사령부의 사령관은 그의 부관이었던 크레이톤 에이브람스가 승계하였다.[122]

    1968년 5월 10일 북베트남과 미국 사이에 평화협정 논의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5개월 뒤 존슨이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 중지를 명령하기 까지 협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미국 민주당은 대통령 후보로 부통령이었던 허버트 험프리를 선출하였고, 공화당에서는 전 부통령 리차드 닉슨을 후보로 선출하였다.

    역사학자 로버트 달렉은 “린든 존슨의 베트남 전쟁 확전은 결국 미군 병사 3만 명과 자신의 대통령직을 댓가로 지불하였다”고 서술하였다.[123]

    1969년~1972년: 베트남화[편집]닉슨 독트린[편집]
    남베트남군의 선전지. 베트남어로 “베트콩 조심해”라는 포스터 아래로 도망칠 곳도 숨을 곳도 없으니 항복하라는 선전문이 영어로 작성되어 있다.새로 미국의 대통령이 된 리차드 닉슨은 구정 대공세가 지나고 난 뒤 철군 계획을 발표하였다. 닉슨 독트린이라 불린 그의 계획은 남베트남군을 강화시켜 스스로의 영토를 방어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이때문에 닉슨의 정책은 “베트남화”라고도 불렸다. 베트남화는 케네디 정부가 구상하였던 남베트남의 독자적 전쟁 수행과 비슷한 것이었지만, 그것과는 달리 분쟁 확산의 방지를 위해 미군이 계속 개입한다는 점이 달랐다.

    닉슨은 한 발표에서 “저는 오늘밤 15만 명의 추가적인 철군 계획을 설명하려 합니다. 철군은 내년 봄까지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것으로 베트남에 주둔한 미군 병력은 15개월 전과 비교하여 총 265,500 명으로 줄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하였다.[124]

    1969년 10월 10일 닉슨은 자신이 베트남 전쟁을 종결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일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B-52s 폭격기 편대에 핵폭탄을 무장하고 소련 영공 부근을 비행하도록 지시하였다. 닉슨은 또한 정전 협상을 지속하는 한편, 차기 주베트남 미군 사령관인 크라이튼 아브람스에게 남베트남군과 협조하여 북베트남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공격을 지속하라고 명령하였다. 동시에 닉슨은 세계적인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소련 및 중화인민공화국과 데탕트를 추진하여 초강대국이 동시에 핵무기를 감축하자는 합의를 보았다. 그러나, 닉슨은 소련과 중화인민공화국이 북베트남에 대한 원조를 지속하는 것에 실망하였다.[125]

    닉슨은 미국의 침묵하는 다수가 자신의 전쟁 정책을 지지한다고 주장하였지만, 미라이 학살과 그린 베레가 캄보디아를 비밀리에 폭격한 감마 계획 등이 알려지면서 미국 내의 반전 운동은 점점 거세지게 되었다.[126] 1970년 초 미군은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던 내륙 지역에서 철수하여 기지를 해안 지역으로 옮겼고, 이로써 1969년 보다 사상자를 줄일 수 있었다.[124]

    호찌민의 죽음[편집]
    미국 좌파 단체가 발행한 호외, 호찌민의 유언시가 영어로 번역되어 적혀있다.1969년 9월 2일 북베트남의 지도자 호찌민이 사망하였다. 호찌민은 유언으로 당의 단결과 전쟁 후 국토 재건을 당부하였다. 일생을 프랑스, 일본, 미국과 상대로 싸웠던 호찌민은 베트남 사람들에게 공산주의자이기 이전에 민족주의자로 알려져 있었다. 남베트남 정부의 지도자였으며 호찌민을 상대로 싸웠고 한때 남베트남의 부통령을 지낸 응우옌까오끼는 전쟁 후 “그는 베트남 인민들에게 존경 그 자체였다. 그는 프랑스는 물론 다른 외침에 대항하는 투쟁에 언제나 앞장섰다. 내가 어려서 철이 없었을 때, 대부분의 베트남 사람들은 호찌민을 대단한 애국자로 생각했다. 나도 그를 대단히 칭송했었다” 고 말했다.[127] 미국의 CBS는 광고없이 7분간 호찌민의 사망을 해드라인 뉴스로 보도하였다.[128] 1969년 9월 8일 하노이 바딘 광장에서 10만명이 운집한 가운데 호찌민의 장레식이 치러졌다.[129]

    캄보디아 라오스 비밀 폭격[편집]1955년 캄보디아의 군주 노르돔 시아누크는 중립을 선언하였다.[130] 하지만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은 캄보디아 영토에 기지를 만들어 사용하였고, 시아누크는 전쟁의 여파가 캄보디아로 확산되는 것을 피하고자 이를 묵인하였다. 하지만, 미국은 1969년 캄보디아의 이러한 정책을 바꾸라고 압력을 가하였고, 캄보디아는 더 이상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하였다.

    닉슨 대통령은 캄보디아의 중립을 지지한다는 미국의 기존 입장과 달리 캄보디아-베트남 국경지대를 비밀리에 폭격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1969년 4월 닉슨은 시아누크에게 서신을 보내 국경지역의 폭격을 허용할 경우 미국은 “캄보디아 왕국의 주권과 중립성, 그리고 영토 보전”을 보장하겠다고 제안하였지만, 시아누크는 이를 거절하였다.[131] 1970년 캄보디아 쿠데타가 일어나 친미 성향의 론 놀 수상이 시아누크를 퇴위시키고 집권하였다. 이를 계기로 정부군과 크메르 루즈 사이에 캄보디아 내전이 발생하였고, 북베트남은 크메르 루즈의 요청을 받아 내전에 개입하였다.[132] 미군과 남베트남군 역시 캄보디아에 개입하여 캄보디아 전역에서 전쟁을 치렀다.

    미군이 캄보디아를 침공하자 베트남전 반대 운동은 더욱 거세졌다. 오하이오 주에서는 켄트 주립대학교에서 반대 시위를 벌이던 네 명의 학생이 총격을 받고 사망하는 일이 발생하였고, 이에 격분한 사람들이 시위에 참여하면서 반전 운동은 더욱 커졌다.[133]

    1971년 《뉴욕타임즈》는 미국의 베트남 개입에 대한 사항을 정리한 일급 기밀 문서인 펜타곤 보고서를 폭로하면서, 미국이 오랫동안 남베트남 정부의 국방부 고위 관료들에게 뇌물을 건낸 사실을 보도하였다. 하지만, 미국 연방 대법원은 정부의 이런 행위가 합법이라고 결정하였다.[134]

    1971년 2월 남베트남군은 라오스 영토 내의 호찌민 통로를 봉쇄하기 위한 람선 719 작전을 시작하였다.[52] 당시 라오스는 표면상 중립을 표방하고 있었지만 북베트남의 호찌민 통로를 묵인하고 있었다. 작전에 나선 남베트남군은 저항군과 교전한 뒤 후퇴하다 길을 잃었다. 남베트남군은 잘못된 길을 헤매다 연료가 떨어지자 차량을 버리고 미군이 헬리콥터로 후송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미군은 남베트남군의 탱크와 차량이 적에게 노획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파괴하여야만 하였다. 그러는 사이 북베트남의 공격으로 남베트남군의 절반 가량이 죽거나 생포되었다. 결국 베트남군의 단독 작전은 큰 실책으로 끝났고, 이는 닉슨의 베트남화 정책 역시 실패하였다는 것을 뜻하였다. 카르노는 “잊지 못할 실수였다. …… 미군에 의해 5년에서 10년 동안 훈련된 베트남군 고위 장교들도 그다지 배운게 없었다”고 기록하였다.[135]

    1971년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가 철군하였다. 미군 역시 196,700 명으로 감축되었고, 1972년 2월까지 45,000 명을 추가로 철군하기로 되어 있었다. 한편, 미국의 반전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있었다.[136]

    1972년 부활절 공세에서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은 남베트남 북부 지역을 신속히 공격하면서 동시에 캄보디아를 지나 남베트남 중부를 양단하는 공세를 가했다. 미국 공군은 뒤늦게 공습에 나섰지만 공세는 이미 지난 뒤였다. 이로써 닉슨의 베트남화 정책은 실효성이 없다는 것이 다시 한 번 드러나게 되었다.

    1973년: 파리 평화 협정[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파리 평화 협정 (1973년)입니다.
    베트남 전쟁은 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주요 논점이 되었다. 닉슨에 대항하여 민주당 후보로 나선 조지 맥거번은 베트남에서 철수해 오는 군인들이 내리는 기차역에서 선거 캠페인을 하였다. 닉슨의 국가 안보 자문이었던 헨리 키신저는 북베트남의 레득토와 비밀리에 정전 협상을 지속하고 있었다. 1972년 8월 키신저와 토는 합의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남베트남의 대통령 티에우는 평화 협정 대다수의 내용을 변경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북베트남이 협정 내용을 공표하자 닉슨 정부는 북베트남이 기만 전술을 쓰고 있다고 비난하였고, 협상은 중단되었다.

     
    라인베커 II 작전 중인 미국 공군, 1972년 12월닉슨은 남베트남에게 여전히 지원하고 있다는 것을 보이고 북베트남으로 부터 유리한 협정 조건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1972년 12월 18일부터 29일까지 하노이와 하이퐁를 폭격하는 라인베커 II 작전을 실행하였다. 무차별 폭격 작전에 사용된 폭탄은 총 12만 톤으로 히로시마 원자 폭탄의 5배에 해당하는 양이었다. 이중 4만 톤이 하노이 시내에 집중되었다. 이 폭격으로 북베트남의 경제와 공업은 큰 타격을 입었다. 같은 시기 닉슨은 남베트남의 티에우를 압박하여 남북 양자간의 평화 유지와 미군 철수를 골자로 하는 협정 조건을 승인하도록 하였다.[137]

    1973년 1월 15일 닉슨은 북베트남에 대한 공격을 중지한다고 발표하였고, 1월 27일 “종전과 베트남의 평화 복원에 대한”파리 평화 협정을 체결하여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을 공식적으로 종결하였다. 평화협정이 체결된 뒤 베트남 남북 정부는 휴전하였고 미군 전쟁포로가 석방되었다. 파리 평화 협정은 제네바 협정과 같이 남북 양측의 영토를 보장하고 선거를 통하여 통일 정부를 구성하도록 규정하였으며, 60일 안에 모든 미군이 철군하도록 하였다. 피터 처치는 “이 조약에 따라 이행된 것은 미군의 완전한 철수 밖에 없었다”고 평하였다.[138]

    미국 내의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편집]
    1971년 4월 24일 워싱턴 D.C.의 반전시위미국 안에서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이유는 다양하였다. 베트남 전쟁 동안 일어난 대규모 유혈 사태를 막기 위해 전쟁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초기 반전 운동은 미국이 제네바 협정에 따른 총선거를 거부하고 지엠 정권을 지원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는 이유로 전쟁에 반대하였다. 존 F. 케네디 역시 상원의원 시절에는 베트남 전쟁 개입을 반대하였다.[82]

    가톨릭 노동자 운동과 같은 신좌파 단체들은 미국 정부가 보이는 반공주의, 제국주의, 식민주의 등에 대한 반대의 일환으로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였다. 한편, 스테펀 스피로와 같은사람들은 베트남 전쟁이 정의로운 전쟁이 아니라는 이유로 반대하였고, 노먼 모리슨과 같은 사람들은 팃꽝득의 행동과 베트남 사람들의 단결을 보면서 전쟁을 반대하였다. 또한,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은 유혈 사태의 확대만을 가져올 것이라는 비판등이 있었다. 베트남 전쟁 개입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매파”, 반대하는 사람들은 “비둘기파”로 불렸다.

    1968년 미라이 학살이 폭로 된 이후 미국 내 반전 운동은 점점 확산되었다. 1968년 8월 26일부터 29일까지 민주당이 주최한 1968년 민주 전국 대회에 참가한 사람들은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139] 1969년 10월 15일 미국에서는 수백만 명이 참여하는 반전 시위가 열렸다.[140] 오하이오 주 켄트 주립 대학교에서는 진압부대가 시위를 하는 대학생을 향해 총격을 가해 네 명의 학생이 목숨을 잃는 켄트 주립 대학교 발포 사건이 일어났다.[141] 이러한 반전 운동은 미국이 베트남 철군을 결정한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142]

    1973년~1975년: 미군 철수 이후[편집]
    1973년 석방된 미군 전쟁 포로를 실어나른 수송기는 “하노이 택시”라고 불렸다.닉슨 정부의 “베트남화” 정책의 마지막 해가 되자 베트남 주둔 미군의 수는 급격히 줄었다. 1971년 3월 5일에는 맨 처음 베트남에 투입되었던 제5 특수군단이 자신들의 본부였던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브래그 요새로 철수하였다.[143] [주해 1]

    북베트남의 외무장관 레득토와 미국의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사이에 파리 평화 협정이 체결되고 베트남의 대통령 응우엔번티에우가 마지못해 협정에 서명한 뒤, 미군은 남베트남에서 완전히 철수하였고 북베트남과 미군 사이에 포로 교환이 이루어졌다. 헙정에 따라 북베트남은 물자의 조달과 같은 제한된 범위 내에서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지원할 수 있게 되었다. 평화 협정의 체결로 키신저와 토는 노벨 평화상을 받게 되었지만, 토는 아직 진정한 평화가 오지 않았다며 이를 거부하였다.

    평화 협정이 체결되자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측은 정전 기간을 최대한 저신들이 유리한 방향으로 사용하려 하였다. 반면에, 사이공은 정전이 발효되기 직전에 미국으로부터 받은 막대한 원조 물자를 사용하여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제거하려 하였다. 이에 대항해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지도자였던 쩐반짜는 1973년 3월 미국의 공습이 멈춘 틈을 타 호찌민 통로를 이용하여 하노이로 가서 이후의 전략을 세우는 회의에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서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은 1975년과 1976년 사이의 건기를 최종 공격 시기로 잡았다.[146]

    1972년 11월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닉슨은 맥거번을 상대로 총 50개 주 가운데 49개 주에서 승리하였다. 1973년 3월 15일 재선에 성공한 미국 대통령 리차드 닉슨은 만일 공산주의 세력이 남베트남을 상대로 무력을 행사한다면 미국 역시 개입할 것이라고 천명하였다. 닉슨은 베트남의 상황을 살피기 위해 그레이험 마틴을 남베트남 대사로 파견하였다. 한편, 미국 국방부 장관 제임스 R. 슈레징거는 북베트남의 공격에 대항하기 위해 폭격을 재개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1973년 6월 4일 미국 상원은 이러한 개입을 금지하는 처치 어멘드먼트 건을 가결하였다.[147]

    제4차 중동 전쟁때문에 촉발된 1973년 유류 파동으로 남베트남은 심각한 경제 위기를 겪었다.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은 1974년 1월 건기를 맞아 공세를 시작하였다. 55명의 남베트남 병사가 사망한 두 번의 무력 충돌이후 남베트남의 티에우 대통령은 전쟁이 재발하였고, 이어서 파리 평화 협정은 효력을 상실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정전 기간 동안 남베트남 측 사상자는 2만 5천여 명에 달했다.[148]

    1974년 8월 9일 리처드 닉슨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하야하자 제럴드 포드가 미국의 대통령 직을 승계하였다. 이때, 의회는 남베트남에 대한 원조 금액을 1억 달러에서 7백만 달러로 삭감하였다. 1974년 미국의 보궐 선거 결과 민주당이 의석 과반수를 차지하게 되었고 정부의 전쟁 수행에 대한 반대가 더욱 강화되었다. 의회는 1975년 지원 예산 가운데 군사 활동 부분을 삭감하였고, 1976년 지원분에 대해서는 전액을 삭감하였다.

    1973년에

    Comment

    좌번 13-10-02 01:53
    이 부분의 본문은 대한민국군 베트남전 참전입니다.
     비둘기 부대, 청룡 부대, 맹호 부대, 백마 부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당시 대한민국의 박정희 정권은 반공주의를 내걸고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베트남 전쟁에 파병하였다. 대한민국의 파병은 미국의 요청이 있기 전인 1961년 박정희가 존 F. 케네디에게 먼저 제안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 케네디의 정책은 베트남 전쟁에 미군을 직접 투입하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에 박정희의 제안을 거절하였다.[167]

    케네디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린든 B. 존슨은 1964년 대한민국에게 의료 부대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1964년 5월 9일 미국이 보낸 서한에는 "1개 이동 외과병원"을 파병해 주도록 요청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국방부는 130명 규모의 이동 외과 병원과 10명으로 편성된 태권도교관단 등 140명을 파병하기로 결정했다.[168] 통킹만 사건이후 미국은 대한민국에 후방 지원 부대의 파병을 요청하였고, 대한민국은 제6사단사령부에서 〈한국군사원조단〉 본부인 비둘기부대를 창설하고 1965년 3월 10일 인천항을 통해 파병하였다. 비둘기 부대는 3월 16일 사이공에 도착하였고, 사이공 동북쪽 22km에 있는 지안에 주둔하여 건설 지원임무를 수행하였다.[169]

    1965년 미국은 베트남 주둔 민군의 사상자가 속출하자 곤경에 빠져 있었다. 1965년 3월 11일 김현철 주미대사는 조지 볼 미국무부 차관과의 면담을 통해 "한국 정부는 베트남에서 추가적인 병력을 기꺼이 파견하겠다."고 말했으며, 이동원 외부무 장관은 브라운 주한미국 대사와의 다음과 같이 협상을 한다.

    파병 상한선은 5만명이내
    한국군의 현대화 지원
    북한의 침공시 미국이 즉각 출병하도록 한미방위조약을 개정한다.
    남베트남에서 사용할 군수품 공급 등 한국의 남베트남 시장진출을 보장한다.
    위와 같은 한국 정부의 요구사항은 1965년 5월 17일에서 18일까지 워싱턴에서 개최된 한미정상회담에서 대부분 타결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 정부는 6월 14일 남베트남 정부로부터 전투병력 정식 파병요청서를 접수하고, 8월 13일에 국회 의결을 얻었다. 대한민국 국방부는 주월한국군사령부를 창설하고 수도사단장 채명신 소장을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청룡 부대가 1965년 10월 9일 깜란에 상륙하였고, 9월 20일부터 주월한국사령부가 사이공에서 업무를 시작하였다. 11월 1일에는 맹호 부대가 뀌년에 상륙을 하였다.[170]

    대한민국의 베트남 파병 병력의 누계는 32만명에 달했다.[171] 베트남파병 병사의 의무 기간은 1년이었고, 파병이 최고조에 달했던 1968년 당시의 베트남에 주둔한 한국군의 수는 5만여 명이었다. 파리 평화 협정으로 미군이 철수하면서 대한민국 역시 철군하였다.[172]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한국군의 전사자는 약 5천여명이었고 1만 1천명이 부상을 입었다. 한국군은 전쟁 중에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전투원 약 4만 1천 여명을 사살하였다고 밝히고 있다.[171] 미국은 한국군 병사에게 2억 36백만 달러를 지불하였고[171], 대한민국은 파병의 댓가로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 대한민국의 GNP는 파병을 전후로 하여 5배 가량 성장하였다.[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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